단순 잘못된 밥상머리 습관 아냐
먹고자 하는 욕구와 음식통제에 대한 실패가 합쳐지며 유발
여대생 이모 씨(20)는 최근 가족과 밥상을 마주하지 않는다. 대학에 입학한 뒤 외모 강박에 시달리며 다이어트에 과도하게 집착하고 있어서다. 그의 어머니는 체형관리에만 신경쓰는 딸의 식습관이 영 거슬린다. 모녀는 같은 식탁에만 앉으면 서로 짜증을 내게 돼 어느새 자연히 같이 식사하는 시간이 줄어들고 있다.
이 씨는 “고3때는 대학에 들어가기만 하면 로맨틱코미디 같은 일상이 펼쳐질 것으로 기대했던 게 사실”이라며 “하지만 현실은 외모가 예쁜 아이들에게만 국한된 얘기였다”고 말했다.
이어 “기본적으로 일단 마르고 봐야 호감을 얻는 게 눈에 보였다”며 “주변 예쁜 친구들이 사람들에게 받는 대우를 보고 상대적 박탈감이 들었다. 여름방학 때부터 다이어트에 집착하기 시작한 것 같다”고 덧붙였다.
이 씨는 3개월간 약 12㎏를 감량했다. 그는 “2학기 개강 후 달라진 모습에 사람들의 태도가 호의적으로 변했다”고 믿었다. 다이어트는 처음엔 절식으로 시작됐다. 우선 칼로리부터 줄이는 것에 초점을 뒀다. 하루에 700㎉ 안팎의 음식만 섭취했다. 하지만 시간이 지나며 식사량을 줄이는 게 버거워지기 시작했다. 참지 못하고 고칼로리 음식을 폭식하기도 했다. 다음날 바로 몸무게가 늘어난 것을 보고 좌절했다.
그는 ‘맛있는 음식’을 갈망했지만 살이 찌는 게 두려웠다. 결국 선택한 것은 ‘씹고 뱉기’였다. 맛은 느끼지만 뱉어버리면 칼로리 걱정은 없다는 생각에서다.
이 씨의 아버지는 “가족들이 다같이 식사하는 자리에서 계속 씹고 뱉는 모습이 좋아 보이는 장면은 아니다”며 “같이 먹는 사람들의 입맛까지 뚝 떨어지게 만드는 걸 모르는 모양”이라고 말했다. 이어 “다이어트 전에도 귀여운 모습이었는데 지나치게 체중감량에 집착하는 모습에 속상하다”며 “타이르고 혼을 내보기도 했지만 전혀 말을 듣지 않는다”고 토로했다.
이 씨처럼 음식을 씹고 뱉는 것을 단순히 ‘잘못된 밥상머리 습관’으로만 치부해서는 안 된다. 이같은 현상도 엄연히 섭식장애의 하나로 볼 수 있다. 이 씨도 자신의 식습관이 문제될 게 없다고 생각한다. 그는 “먹고 토하는 거식증이 아니면 문제될 게 없지 않느냐”는 입장이다. 실제로 젊은 여성 중에는 이같은 속칭 ‘씹뱉’(씹고 뱉는 행위)을 자신의 체중관리 비법으로 여기는 경우가 적잖다.
김율리 인제대 서울백병원 섭식장애클리닉 교수는 “씹고 삼키지 않고 뱉는 행동은 영아나 발달장애가 있는 경우에 나타나기도 하지만, 청소년이나 성인에서 이런 행동이 빈번하게 일어난다면 섭식장애의 증상인 경우가 많다”고 강조했다.
섭식장애는 최근 50년간 꾸준히 증가세를 보이며 주로 선진국에서 많이 나타난다. 식이 행동과 관련된 이상 행동과 생각을 통틀어 일컫는다. 대표적으로 거식증, 폭식증, 신경성 폭식증(binge eating) 등을 꼽을 수 있다.
몸매가 하나의 ‘스펙’으로 평가되는 만큼 ‘이상’에 도달하기 위해 건강에 악영향을 주는 다이어트 비법들이 쏟아지고 있다. 씹고 뱉는 행위도 마찬가지다. 한창 성장해야 할 청소년조차 무리한 체중감량에 나선다. 2005~2011년 만 13~18세 청소년 41만명을 대상으로 진행된 청소년건강행태온라인조사 결과 설사약, 이뇨제, 식사 후 구토, 원푸드 다이어트 같은 부적절한 방법으로 체중감소를 시도한 한국 여학생이 20%이상을 차지했다.
이같은 현상은 여성의 아름다움과 날씬함을 성공과 절제심의 상징으로 여기는 분위기에서 비롯됐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정상 체중을 가진 국내 여성 10명 중 4명은 ‘자신이 뚱뚱하다’고 느끼는 왜곡된 신체이미지를 갖고 무리한 다이어트에 나서고 있다.
김 교수는 “씹고 뱉는 행위는 먹고자 하는 욕구와 음식통제에 대한 실패가 합쳐져서 나타난다”며 ”지속되면 영양실조, 치아 손상, 전해질 이상 등이 초래될 수 있다”고 설명했다.
사람에서 음식을 맛보고 씹는 구강미각의 자극과 저작근육의 운동은 소화와 관련된 신경소화기계 운동을 자극함으로써 다양한 소화기계 활동을 촉발하게 된다. 이 때 삼키지 않고 뱉게 되면 신체는 거짓 음식섭취 정보를 입력하게 돼 신경내분비계를 와해시키고 음식 섭취의 통제력을 상실케 만들어 오히려 다음에 폭식 증상을 유발하기도 한다.
김율리 교수는 “구강과 소화기계가 밀접하게 결부된 만큼 이같은 행동을 쉽게 생각해선 안 된다”며 “문제가 심각해져 혼자 증상을 조절하기 어렵다면 습관화되기 전 섭식장애에 대한 전문적인 치료를 받는 게 필요하다”고 조언했다.
취재 = 정희원 엠디팩트 기자 md@mdfact.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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