심·뇌혈관질환 사망자 5만 명 시대. 해마다 심혈관질환으로 2만6000여 명, 뇌혈관질환으로 2만4000여 명이 희생된다. 국내 사망자 5명 중 1명이 혈관이 막혀 죽음에 이른다. 혈관질환에 대한 경각심이 높아져 이제는 꼼꼼하게 혈관 수치를 챙긴다. 혈압·콜레스테롤·혈당 수치가 그것이다. 혈관건강을 챙기는 3대 수치로 불린다. 하지만 간과되고 있는 지표가 있다. 바로 혈관 염증반응 수치다. 다른 혈관수치가 정상이라고 안심하다가 뒤늦게 질환을 발견해 낭패를 볼 수 있다. 염증반응 수치는 콜레스테롤보다도 정확한 동맥경화 예측인자다.
용산구에 사는 박모(59)씨가 대표적이다. 그는 최근 갑자기 가슴을 쥐어짜는 듯한 통증을 느껴 병원 응급실을 찾았다가 덜컥 협심증 진단을 받았다. 협심증은 동맥경화·혈전증 등으로 관상동맥이 좁아지거나 막혀 심장에 산소와 영양 공급이 줄어들면서 생기는 심장질환이다. 그는 정기적으로 받는 건강검진에서 혈관 수치에 큰 이상이 없던 터라 당황스러웠다. 그는 스텐트 시술을 받고 나서야 건강을 되찾았다. 병원 검사에서 나온 그의 혈관 수치는 LDL 콜레스테롤 104㎎/dL, HDL 콜레스테롤 46㎎/dL, 총 콜레스테롤 171㎎/dL 였다. 모두 정상치였다. 박씨는 “평소 콜레스테롤 수치가 높지 않아 안심하고 있었다”며 “협심증에 걸릴 거라고는 생각지 못했다”고 말했다.
직장인 이모(48)씨도 비슷한 경우다. 그는 최근 건강검진 결과를 받고 의료진으로부터 섬뜩한 이야기를 들었다. 관상동맥질환 발생 위험이 높으니 각별한 주의가 필요하다는 것이다. 평소 건강검진에서 혈관 수치는 늘 정상 범위였다. 이번 검사 결과도 그랬다. 이씨는 의아해 왜 위험도가 높은지 의료진에게 물었다. 의료진이 제시한 것은 ‘고감도 C-반응성 단백질 검사(hs-CRP)’ 수치였다. 생소한 검사였다. 그는 혈액에 포함된 당분이나 지방뿐 아니라 염증반응도 혈관질환 위험과 직접 관련이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됐다. 그 뒤로 그는 건강식단으로 바꾸고 피우던 담배도 끊었다.
동맥경화 예측인자 hs-CRP 검사
건강한 사람과 성인병 환자의 혈액을 현미경으로 관찰한 사진. 건강한 혈액(왼쪽)은 입자가 선명하고 균일한 반면 환자의 혈액은 입자가 뭉쳐 있다.
고감도 C-반응성 단백질 검사는 일반인에게 잘 알려지지 않은 검사다. 이 검사는 쉽게 말해 혈액의 염증 반응 정도를 나타내는 검사다. 여기서 C-반응성 단백질(CRP)은 몸안에 염증이 생기면 생성되는 급성 반응 물질이다. 혈중 농도를 측정해 몸안의 염증 정도를 가늠한다. 관절염 등 염증질환이나 폐렴 등 바이러스 질환에 걸리면 수치가 올라간다. 감기에 걸리거나 종양이 생겨도 수치가 변한다.
혈관질환을 예측하는 데 사용되는 것은 고감도 검사다. CRP의 아주 미세한 변화를 측정하는 것이다. 일반적인 염증은 단순히 CRP검사로 가능하지만 동맥경화가 진행될 때 생기는 염증은 극도로 작은 염증이다. 그래서 아주 낮은 농도의 CRP 변화에도 반응하는 고감도 검사로만 측정이 가능하다. 강동경희대병원 진단검사의학과 강소영 교수는 “동맥경화 등 혈관질환 발생 위험은 일반 염증 검사에서는 정상 범위에 해당할 정도로 미세한 염증 반응으로 나타난다”며 “hs-CRP검사는 이 차이를 감지해 혈관질환 발생 가능성을 판단한다”고 말했다.
그래서 혈관질환을 예측하는 데는 오히려 CRP검사 결과가 정상인 사람이 대상이다. 단순 CRP검사의 정상 수치는 5~10㎎/L다. 반면에 고감도 검사에서는 정상 수치가 CRP 검사의 채 10분의 1도 안 되는 0.3㎎/L 이하다.
미국심장학회 심혈관질환 예측인자로 채택
동맥경화 등으로 인한 혈관질환을 예측하는 데 가장 중요시됐던 수치는 콜레스테롤 수치다. 하지만 콜레스테롤 수치가 정상이더라도 심혈관질환이 발생할 수 있다는 사실이 밝혀졌다. 미국 심장병 연구의 핵심 자료로 평가되는 프라밍햄심장병연구(Framingham Study)에 따르면 심혈관질환자의 35%는 실제 총콜레스테롤 수치가 200㎎/dL(정상 수치: 240㎎/dL) 이하인 것으로 나타났다. 아무리 콜레스테롤 수치가 정상이라도 심혈관질환을 안심할 수 없다는 얘기다.
의학계에서는 콜레스테롤 수치만으로는 심혈관질환 예측인자로 부족함이 있다는 지적이 제기됐다. 그리고 1998년 미국 심혈관질환 전문가 폴 리드커(Paul Ridker) 박사가 콜레스테롤 수치를 보완할 만한 예측인자로 CRP를 제시했다.
미국심장학회(AHA)와 미국 질병통제센터(CDC)는 관상동맥질환·뇌졸중 등 혈관질환과의 상관관계를 체계적으로 분석했다. 그리고 hs-CRP 검사가 혈관질환을 예측하는 데 예민한 검사라는 결론을 내렸다. 심혈관계질환 경험이 없었던 성인의 경우 0.3㎎/L 이하를 정상치로 규정했다. 특히 심혈관계질환 위험도 평가와 예후를 추정하는 첫 번째 검사로 추천하고 있다. hs-CRP 검사 결과 1㎎/L 미만 시 저위험, 1~3㎎/L 위험, 3㎎/L 초과 시 고위험군이다.
혈관질환을 유발하는 메커니즘
CRP가 예측인자가 될 수 있는 이유는 혈관질환이 생기는 과정을 보면 알 수 있다. 혈액 속에 지방질이 많아지면 이를 제거하기 위한 생리반응이 나타난다. 혈액 속 혈소판과 백혈구가 수십만 개의 돌기를 뻗으면서 이물질이 들어왔다는 신호를 온몸에 보낸다. 그러면 다른 곳에 있던 혈소판과 백혈구가 모여들어 지방질에 들러붙어 덩어리가 된다. 이때 과도하게 모여 만들어진 것이 바로 혈전이다. 혈당이 높아져도 유사 반응이 일어난다.
여기에 또 하나의 인자가 있다. 바로 백혈구의 민감도, 즉 염증 반응 정도다. 염증 반응은 백혈구가 이물질을 처리하는 과정을 말한다. 이 정도가 심하면 혈중 이물질이 많지 않더라도 백혈구가 과하게 반응해 혈전을 많이 발생시키는 것이다. 마치 도로에 자동차가 많지 않아도 과속하면 사고율이 높아지는 것과 같은 이치다. hs-CRP 검사는 이 미세한 염증 반응을 감지해 심혈관질환 위험도를 예측한다. 혈당과 지방이 정상이라도 동맥경화에 걸릴 수 있는 이유다.
강북삼성병원 순환기내과 이종영 교수는 “실제 동맥경화 환자 중에 혈중 콜레스테롤과 혈당 수치가 그다지 높지 않은 사람이 꽤 있다”며 “이들은 백혈구가 과반응해 질환에 걸릴 위험이 높아진다”고 말했다.
류장훈 기자 jh@joongang.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