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행복하려고 이혼했는데 우리 아이는 왜 행복하지 못할까요.”
최근 아내와 이혼한 강모씨는 아홉살 아들과 함께 살고 있다. 강씨의 아들은 평소에 책도 많이 읽고 아빠 말도 잘 듣는 착한 아들이지만, 이혼 후 부쩍 주눅이 든 모습이었다. 강씨가 “왜 그러냐”고 물어도 입을 꾹 다문 채 아무 말도 하지 않는다. 상담기관을 찾아간 강씨는 자신이 아들에게 “나간 엄마 얘기는 왜 하느냐”고 전처에 대한 분노를 드러내며 심하게 다그친 적이 있다는 점을 깨닫고 아들과의 관계 개선을 위해 노력하는 중이다.
16일 경남과기대 사회복지학과 한복연씨의 석사학위 논문 ‘이혼 의사 영향요인의 남녀 차이와 부모교육 참여 효과 및 설득요인의 조절 효과’에 따르면 협의이혼 숙려기간에 있는 부부 152명을 상대로 이혼 의사 표현 후 누구와 살고 있는지 조사한 결과 ‘본인 혼자’ 31.6%(48명), ‘본인과 자녀’ 31.6%(48명), ‘부부와 자녀’ 2.3%(37명), ‘본인·자녀·부모’ 11.8%(18명), ‘본인·자녀·형제’ 0.7%(1명)로 한쪽 배우자가 자녀를 데리고 사는 경우가 절반에 가까운 것으로 나타났다.
◆“나 때문이야?”… 부모 아픔 함께 겪는 아이들
부모의 이혼은 미성년 자녀에게 세상이 무너지는 것만큼 충격적인 사건이다. ‘부모의 갈등을 함께 겪는 우리 아이’라는 주제로 지난 5월 서울가정법원에서 대중 강연을 연 소아청소년정신과 전문의 서천석 행복한아이연구소 소장은 “이혼은 너무나 흔하지만, 흔하다고 해도 아이에게는 심각한 사건”이라며 “이 과정에서 자녀는 ‘내가 말을 안 들어’ 부모가 이혼까지 갔다는 죄책감에 시달린다”고 말했다. 서 소장은 “자녀는 부모의 이혼 이후 버림받았다는 상실감과 ‘부모 중 누가 날 데려갈까’에 대한 불확실성으로 힘들어 한다”며 “이혼을 결심한 부모의 아이만큼 부모가 필요한 아이는 없다”고 덧붙였다.
보통 이혼 과정을 겪고 있거나 이혼한 부부 상당수는 자신이 겪는 감정에 파묻혀 자녀를 돌볼 여유를 찾지 못하는 경우가 많다. 이혼으로 인한 불행을 상대방 탓으로 돌리고 자녀에게 부정적 감정을 강요하거나 전 배우자에 대한 비난을 쏟아붓기도 한다. 혹은 일에 몰두하는 형태로 자기 감정을 추스르는 동안 아이들은 고립감과 자존감 저하로 인한 문제 행동을 보이기도 한다.
부모의 상황을 받아들일 준비가 안 된 자녀에게 섣불리 이혼 사실을 털어놓는 것 역시 아이에게 막대한 스트레스를 줄 수 있으므로 피해야 한다.
지난 3월 서울가정법원 가사3부(부장판사 이수영)는 경제적 어려움으로 이혼 후에도 한 집에서 살며 사실혼 관계를 유지하고 있던 상황에서 술김에 “우리 이혼했다”며 자녀에게 이혼 사실을 알린 남편을 상대로 아내가 위자료를 청구한 사건을 심리했다. 재판부는 남편의 잘못을 인정해 “아내에게 5000만원을 지급하라”고 판결했다.
◆“이혼 후 ‘골든타임’은 6개월”… 개입 나선 법원
전문가들은 부모의 이별과 가정의 해체로부터 자녀의 충격을 최소화하기 위해 부모의 갈등이 표면화된 뒤 적어도 6개월이 넘지 않는 기간 내에 상황을 설명해야 한다고 조언한다.
강은숙 서울가정법원 상담위원은 “이혼 소송까지 온 부부는 이미 서로에게 상처를 많이 주고받아 감정의 골이 깊어진 상태로 장기간 이혼 과정을 겪을 수밖에 없다”며 “이혼을 결심했다면 ‘골든타임’이라고 할 수 있는 1∼6개월 내에 우리 아이의 상태가 어떤지 파악하고 이해를 구하도록 해야 한다”고 말했다. 이어 “때를 놓치면 불필요한 오해와 갈등으로 자녀에게 부정적 영향을 미칠 가능성이 크다”고 덧붙였다.
서울가정법원은 이혼 조정 과정에서 상담 및 자녀양육 교육 강화를 골자로 한 새로운 가사소송 모델을 2014년 9월부터 적용하고 있다. 이혼 후에도 ‘건강한 가정’을 유지하기 위해서다.
이혼이 ‘진흙탕 싸움’이 아닌 당사자 모두에게 생산적인 과정이 될 수 있도록 소장에는 최소한의 정보만 기재하고 미성년 자녀의 정보나 배우자의 부정·폭력 등 구체적 내용은 별도로 만들어 제출하도록 했다. 이후 가정법원의 전문 가사조사관이 부부의 갈등 초기 단계에 개입해 가족별로 최적화된 사건진행 방향을 모색하는 ‘맞춤형’ 서비스를 제공한다. 이혼으로 배우자로서의 역할이 끝난 뒤에도 자녀의 부모 역할은 계속할 수 있도록 자녀양육 교육과 면접교섭센터도 운영한다.
서울가정법원의 한 판사는 “과거 부부관계의 법률적 복리에 치우쳤던 이혼 사건의 무게중심이 지금은 미성년 자녀 보호 쪽으로 이동했다”며 “사건이 끝난 후에도 법원이 사실상 자녀에 대한 ‘후견인’ 역할을 하고 있는 셈”이라고 말했다.
김민순 기자 soon@segye.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