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년 남성, 우울증 주의보] ‘마음 몸살’ 위기의 아버지들

대기업 부장 A씨(46)는 요즘 부하직원 E씨(34) 때문에 고민이다. 항상 성실하다고 평가한 E씨의 모습이 예전 같지 않기 때문이다. 자꾸 중요한 일을 빠뜨리고 잊어버린다. 도대체 일을 할 생각이 있는지 의심스러울 정도다. 의욕이 없고, 회의 때도 적극성을 보이는 일이 눈에 띄게 줄었다.

가끔 멍청히 앉아 있는 걸 쳐다보고 있으면 속이 뒤집혀 소리라도 지르고 싶은 심정이다. E씨의 영향으로 다른 직원들도 할 일이 늘어나 불만이 쌓였다. 심지어 E씨가 안 나가면 자기가 나가겠다는 직원까지 생겼다.

조용히 불러 “무슨 고민이 있느냐”고 물어봤지만 별 대답이 없었다. 얼마 후 E씨는 결근을 하기 시작했다. 병원에 가야 했기 때문이다. A씨는 그때서야 그의 행동이 우울증 때문인 것을 알고 주위 사람들을 새삼 다시 살펴보게 됐다.

B씨(53)는 한 달 전부터 이유 없이 잠이 오지 않고, 자다가 깨는 일이 잦아져 고민이다. 출근하면 이유 없이 무기력하고 피곤해 일을 하고 싶은 의욕이 나지 않았다.

사보에 명예퇴직자 명단이 나온 것을 보고 자신도 신청해야 하는 것은 아닌지 이유 없이 불안하고 초조해졌다. 갑자기 속이 답답하고 자신의 심장소리가 크게 느껴져서 인근 내과 의원을 찾아 검사도 했다. 하지만 술 때문에 생긴 병이라고 할 수 있는 만성 위염 외에 특별한 병은 없다는 진단을 받았다.

B씨는 그 뒤 잠을 자려고 밤에 혼자 술을 마시기 시작한 것이 일과처럼 됐다. 술을 먹지 않으면 더욱 불안하고 초조해져 잠을 이룰 수 없었기 때문이다. 알고 보니 B씨를 괴롭힌 증상 역시 E씨처럼 ‘마음의 지진’ 우울증이 가져온 변화였다.

대한민국 중년 남성들은 지금 무슨 힘, 무슨 낙으로 살고 있을까. A·B·E씨와 같이 우울증으로 하루하루를 힘겹게 보내는 사람들이 점점 많아지고 있다.

2013년 한 해 동안 국내 병원에서 우울증 치료를 받은 남성 환자가 20만8756명이나 되는 것으로 밝혀졌다. 5년 전인 2009년(16만9180명)보다 무려 3만9576명 늘었다.

건강보험심사평가원은 2009년부터 2013년까지 최근 5년간 ‘연령별·성별 우울증 진료 인원 및 점유율 추이’를 조사한 결과 2009년 30.5% 수준이던 남성 환자 비율이 2011년 30.9%, 2013년 31.4%로 해마다 조금씩 높아졌다고 5일 밝혔다.

특히 40∼59세 중장년 남성 우울증 환자가 눈에 띄게 증가했다. 2009년에 우울증으로 병원을 찾은 환자는 40대 3만3105명, 50대 3만4413명 등 6만7518명에 불과했으나 2013년에는 각각 3만5723명, 4만6302명 등 8만2025명으로 늘었다. 불과 5년 만에 40∼59세 남성 우울증 환자가 1만4507명이나 늘어난 것이다.

2013년 기준 연령대별 남성 우울증 환자 분포는 50대가 20.6%로 가장 많았다. 이어 70대 이상 20.2%, 60대 16.4%, 40대 15.9%, 30대 10.8% 순이었다. 같은 기간 우울증 진료비는 2135억원에서 2714억원으로 27%가량 증가했다.

우울한 40, 50대 중년 남성의 증가와 더불어 극단적인 선택을 하는 비율도 높아지고 있다. 통계청에 따르면 2013년 한 해 50대 남성의 자살률은 인구 10만명당 58명으로 전년(53.2명) 대비 8.9% 증가한 것으로 집계됐다.

‘마음의 지진’ 우울증을 앓는 사추기 남성이 많아진 이유는 작장생활의 스트레스가 과거보다 심해진 탓이다. 한림대(평촌)성심병원 정신건강의학과 전덕인 교수는 “회사 사정으로 조기 퇴직하는 바람에 생활고에 빨리 부딪히고, 양육 및 부양에 대한 경제적 부담으로 큰 스트레스를 받는 ‘사오정’ 중년 남성이 많아진 게 원인”이라고 풀이했다.

여성의 지위가 높아짐에 따라 상대적으로 남성의 지위가 위축됐고, 이혼이 늘면서 병원을 찾아 우울증 진단을 받는 남성의 비율이 높아진 점도 우울증을 겪는 중년 남성이 늘어난 요인으로 꼽힌다.

우울증은 한번 생기면 잘 없어지지 않는다. 의욕저하와 불면증을 동반해 더 고통스럽다. 하루만 잠을 안 자도 힘든데 한 달 가까이 1∼2시간밖에 못 잔다면 어떻겠는가.

더 큰 문제는 우울증으로 고통 받는 중년 남성들이 사회에서 모범적으로 역할을 잘 수행하고, 가정에서도 아버지로서 훌륭한 경우가 대부분이라는 사실이다. 강남세브란스병원 정신건강의학과 김재진 교수는 “꼼꼼하고 일처리에 빈틈이 없으며 항상 남들과 자신을 비교해 스스로를 채찍질하는 ‘성실하고 바른생활 사나이’에게서 우울증 환자가 많다”며 “이들을 위한 정신건강 대책 마련이 시급하다”고 말했다.

이기수 의학전문기자 kslee@kmib.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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