ㆍ정부가 월평균 1500만원 지원…대형병원 응급실보다 진료비 저렴
ㆍ이용자 80% “만족”에도 전국 11곳뿐…동네 병원 “불공정” 항의도
서울 송파구에 사는 직장인 백모씨(41)는 지난해 5월27일 잊지 못할 경험을 했다. 그날 오후 8시쯤 다섯살짜리 아들이 열이 오르고 아프기 시작했다. 평소에 다니던 동네 소아과 병원은 문을 닫았을 시간이었다. 선택의 여지가 없던 백씨 부부는 아이를 안고 집 근처 대형병원 응급실로 향했다.
그러나 이들 가족은 응급실에서 의사를 만나 첫 진료를 받기까지 1시간 이상 대기해야 했다. 진료비는 일반 소아과 병원보다 6배 정도 비쌌다. 더욱이 당시는 삼성서울병원 응급실에서 중동호흡기증후군(MERS·메르스)이 소리 없이 전파되던 때였다. 그날 삼성서울병원 응급실을 선택했다면 온 가족이 메르스 감염원에 노출됐을 터였다. 백씨는 “경황이 없어 대형병원 응급실에 갔지만 돌이켜보면 아찔한 상황이었다”며 “동네에 매일 야간진료를 하는 소아과 의원이 없는 게 아쉽다”고 말했다.
■평일 오후 11~12시까지 진료
야간진료를 하는 소아과 병원을 찾기는 쉽지 않다. 야간진료를 한다 해도 평일엔 오후 10시쯤이면 문을 닫고 휴일엔 진료를 쉬는 경우가 많다. 사정이 이러니 늦은 시각 아이가 갑자기 아프면 큰 병원 응급실로 갈 수밖에 없다. 소아환자는 응급실 환자의 31.2%를 차지하는데, 이들 중 상당수가 감기·편도염 등의 진단을 받는다. 주변에 갈 만한 소아과 병원만 있다면 굳이 응급실에 가지 않아도 되는 경증 질환이다.
이런 불편을 해소하기 위해 탄생한 것이 달빛어린이병원이다. 달빛어린이병원은 소아청소년과 전문의들이 평일 오후 11~12시, 휴일은 오후 6~10시까지 365일 진료하는 병원을 말한다. 운영 요건을 갖춘 소아과 병원이 정부에 신청하면 정부가 달빛어린이병원으로 지정하고 인건비 등 운영비 일부를 월평균 1500만원가량 지원한다.
달빛어린이병원이 첫선을 보였을 때 이용자들의 반응은 뜨거웠다. 보건복지부가 2014년 9월부터 4개월간 시범사업을 시행한 뒤 실시한 설문조사에서 응답자의 80.7%가 ‘달빛어린이병원에 만족한다’고 말했다. 88%는 ‘재방문 의향이 있다’고 했고, 87.3%는 ‘지인에게 추천할 의향이 있다’고 답했다.
대형병원 응급실은 중증 응급환자에게 우선순위가 밀리기 때문에 증상이 가벼운 소아환자가 진료를 받으려면 오랜 시간 기다려야 한다. 기다림 끝에 의사를 만나도 소아청소년과 전문의가 아니라 전공의(레지던트)일 확률이 높다. 감염의 위험도 있다.
무엇보다 대형병원 응급실 진료비는 일반 병원보다 최소 6배 이상 비싸다. 복지부가 산출한 실제 진료비 사례를 보면 달빛어린이병원(종합병원급)의 경우 열·코감기 환자는 총진료비 2만270원 중 본인부담금 7000원을 냈다. 초진진찰료와 의료질평가지원금, 투약·처방비가 포함된 가격이다.
반면 대형병원(상급종합병원급) 응급실에서 열·목감기 진료를 받은 환자는 총진료비 7만6360원 중 본인부담금 4만4700원을 냈다. 총진료비에는 달빛어린이병원에선 내지 않아도 되는 응급의료관리료 4만9280원이 포함돼 있다.
■의사들 이해 엇갈려 참여 저조
달빛어린이병원은 소아환자와 부모에게 여러모로 편리한 곳이지만 공급이 수요를 따라가지 못하고 있다. 달빛어린이병원은 24일 기준 전국에 11곳밖에 없다. 인구가 가장 많은 서울에는 한 곳도 없고 수도권으로 범위를 넓혀봐도 경기 지역에 한 곳이 있을 뿐이다.
2014년 9월 소아과 병원 8곳에서 달빛어린이병원 시범사업을 시작한 정부는 지난해 30개 의료기관으로 시범사업을 확대할 계획이었다. 그러나 공모에 참여한 의료기관은 총 15곳에 그쳤다. 그나마도 도중에 달빛어린이병원 지정 취소를 신청하거나 운영을 잠정 중단해 현재 11곳만 남아 있다.
소아과 병원의 참여가 저조한 가장 큰 이유는 이 제도를 둘러싸고 소아청소년과 개원의사들의 이해관계가 엇갈리기 때문이다. 달빛어린이병원으로 지정된 병원은 야간진료를 통해 수입을 늘릴 수 있는 데다 연간 1억8000만원(월평균 1500만원)의 정부 지원금을 받을 수 있다. 이 사업에 참여할 여건이 되지 않는 개원의들 사이에선 정부 지원금이 시장 경쟁의 룰을 해친다는 불만이 나오는 것으로 알려졌다. 환자가 달빛어린이병원으로 몰릴 경우 낮 진료만 하는 소아과 병원의 환자 수가 감소할 수 있다는 목소리도 있다.
달빛어린이병원을 운영하다가 중단한 한 병원 원장은 “지역 소아과 개원의사회에서 ‘정부 지원금을 받고 운영하는 건 공정하지 못하다’는 항의가 있었다”며 “지역 의사회 분위기가 좋지 않은 탓에 전문의를 신규 채용하는 데도 어려움을 겪었다”고 말했다. 이 원장은 “‘정부 돈 받는다’는 소리가 듣기 싫어 달빛어린이병원 지정 취소를 정부에 신청했다”며 “환자들 반응이 좋았기 때문에 야간진료 체계는 달빛어린이병원 때와 동일하게 유지하고 있다”고 말했다.
복지부는 달빛어린이병원 참여 기관을 지속적으로 늘려가겠다는 입장을 갖고 있다. 이를 위해선 소아과 개원의들의 불만을 잠재워야 한다는 숙제가 놓여 있다. 복지부 관계자는 “소아청소년과 개원의사회와 대화를 이어나갈 방침”이라며 “서로 접점을 찾을 수 있도록 다양한 길을 열어놓고 해결책을 모색하겠다”고 말했다.
■달빛병원 요건은?
지난해까지 보건복지부는 공모 기간을 정해놓고 소아과 병원들을 대상으로 달빛어린이병원 참여 신청을 받았다. 그러나 참여 병원이 정부 목표치 30곳의 절반도 안되는 11곳에 그치자 올해부터 상시 모집으로 방침을 바꿨다.
복지부 관계자는 24일 “공모 기간이 지나간 뒤 참여 의사를 밝히는 의료기관이 몇 곳 있었다”며 “상시 신청을 받아 요건을 갖춘 의료기관은 달빛어린이병원으로 지정할 계획”이라고 밝혔다.
달빛어린이병원 지정을 원하는 소아과 의료기관은 야간·휴일 진료 마감 시간을 정하고 이를 지키겠다고 약속해야 한다. 복지부 및 지방자치단체와의 협의 없이 약속 시간 이하로 운영할 수 없다. 진료 마감 시간은 평일의 경우 오후 11~12시, 휴일은 최소 오후 6시 이후로 정해야 한다. 소아청소년과 전문의를 3명 이상 확보하고, 이들이 365일 소아환자를 진료해야 한다. 다만 1년 중 3일 이내로 휴진할 수 있으며 이 사실을 환자들에게 미리 공고해야 한다.
복지부는 규모가 작아 전문의 3명을 확보할 수 없는 소아과 병·의원도 참여할 수 있도록 3개 병·의원이 연합하는 형태도 허용하고 있다. 연합 형태의 병원들은 야간·휴일 진료에 공백이 생기지 않는 한에서 요일을 나눠 돌아가며 진료할 수 있다.
복지부 관계자는 “달빛어린이병원으로 지정되면 지역 주민들이 잘 알고 이용할 수 있도록 언론과 포털, 육아 커뮤니티, 반상회보, 초등학교·어린이집 가정통신문 등을 통해 홍보를 지원할 계획”이라고 말했다.